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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주의의 함정, 그리고 기술 주권의 진정한 길카테고리 없음 2025. 6. 29. 21:21

정예주의의 함정, 그리고 기술 주권의 진정한 길
– 언어모델 국가전략 사업이 풀어야 할 구조적 질문
이강훈 | (사)한국인공지능연구소 소장
정부가 주도하는 독자 언어모델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그간 민간이 주도해 온 초거대 AI 개발의 흐름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나아가 한국형 모델을 통해 국가 차원의 기술 주권을 확보하겠다는 이 사업의 출발선 자체는 분명 의미가 깊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추진 방식과 구조에 대해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번 사업의 핵심 방향은 ‘정예화된 소수 기업 중심’이다. 정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인프라와 기술 경험을 보유한 기업을 중심으로 5개 내외의 팀을 구성하고, 여기에 GPU 자원과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겠다는 전략을 선택했다. 일견, 빠른 성과를 내기 위한 효율적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구조가 과연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의 흐름에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을까?
현장의 기술자들이 체감하는 오늘의 생성형 AI 생태계는, 지난 몇 년과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개방형 언어모델들은 매달 새로운 성능을 갱신하고 있으며, 글로벌 커뮤니티에서는 수많은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서로의 실험 결과를 공유하고 협업하며 상호 발전을 이끌어내고 있다. AI의 혁신은 더 이상 단일 기업의 R&D 센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빠르게 실험하고, 유연하게 실패하며, 다층적으로 학습하는 분산형 생태계야말로 오늘날 가장 강력한 기술 진화의 엔진이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감안할 때, 과거 정부 주도 대형 과제의 방식처럼 소수의 대기업에 자원을 몰아주는 접근은 오히려 ‘느린 혁신’의 길이 될 수 있다. 이미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확인해왔다. 수천억이 투입된 전략사업도 결국 “기술 난이도가 높았다”, “예산이 부족했다”는 말로 조용히 종료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이번 언어모델 사업이 같은 결말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구조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GPU 자원 1,000개를 할당받은 몇몇 팀이 과연 챗GPT 수준의 모델을 단기간에 개발해낼 수 있을까? 그들이 과거에 1조 단위의 투자를 받아도 비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생태계와 속도, 그리고 구조였다. 이번에도 같은 팀에게 같은 방식으로 기회를 제공한다면,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예 중심 전략이 놓치는 것은 단순한 참여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속도에 있고, 다양성에 있으며, 열린 실험 구조를 통해 만들어지는 집단 지성의 힘에 있다. 정부가 진정으로 언어모델의 자립을 원한다면, 단기 성과주의와 수직적 위임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간 커뮤니티와 오픈소스 생태계를 제도적으로 결합하고, 다양한 주체가 참여할 수 있는 분산형 R&D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다층적인 기여 방식, 연합형 컨소시엄 모델, 중간 단계의 공개 검증 시스템 등이 함께 마련되어야 지속 가능한 기술 발전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물론 무분별한 예산 분산이나 참여자의 책임 회피는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구조 자체를 폐쇄적으로 설계한다면, 기술의 진보는 또다시 관성의 벽에 막히고 말 것이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특정 기업을 믿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도전할 수 있고, 투명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열린 경쟁의 인프라’를 설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어모델이 단지 몇몇 기업의 프로젝트가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 전체의 기술 기반이고, 미래 산업의 기초이며, 국민의 공공자산이 되어야 한다. 기술 주권이란 단지 코드를 직접 짜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고, 사회 전체가 그 기술을 어떻게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국가대표 언어모델은 모두의 이름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기술을 독점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술을 공유하고, 함께 진화시키는 구조 속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AI 주권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6월 29일이강훈 | (사)한국인공지능연구소 소장